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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2.28사건

by ▽_ 2017. 5. 20.

대만 2.28 사건




  대만 228사건의 시작 

1947년 당시 대만 타이베이에서 전매국 단속원들이 밀수 담배를 판매하던 한 여성 판매원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과잉 진압으로 총격이 발생하여 대만인 한명이 사망함으로서 촉발된 사건

이 사건은 대만인(본성인 - 대만 본토 출신)과 외성인(대륙에서 건너온 외지인)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228시위의 확대

1947년 2월 28일 앞서 말한 밀수 판매원 진압 과정에서 대만인 1명이 사망한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중화민국 경찰과 군을 상대로 한 시위에 대해 당시 대만 경비 총 사령관이였던 천이(陳儀)가 타협은 커녕 도리어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격분한 시민들이 경찰서에 난입 및 경찰을 구타 하였고 이에 경찰관이 사망에 이르자 군이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에 시위는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확대 되었고 분노한 시위대가 대만 방송국을 점거, 대만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친 것이 2.28사건이다. 



탄압의 시작

이 시위의 규모가 삽시간에 커지자 천이는 장제스에게 시위세력 탄압을 위한 혁명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폭동이 정부 전복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장제스는 병력을 보내 주었다. 대만에 도착한 국민 혁명군은 대대적인 유혈 진압을 시작 하였는데 10여일간 이어진 진압으로 양 3만명의 대만인(본성인 - 대만 본토 출신)이 살해 실종 된 것으로 추정 된다. 대부분은 학생이다 대만 원주민 등 무고한 사람이였고 대만 출신의 정치, 경제, 언론인도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사태의 진정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로 인대 대만은 초토화 되었고 장제스는 이 사건과 관련된 인사들의 상당수를 처형 하였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 함으로써 2.28사건은 일단락 되었고 이후 40년 동안 대만에서 이 사건을 언급 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왔다. 


사건의 재조명

오랜기간 대만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어 왔는데 1988년 본토 출신 리덩후이가 대만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진상 조사가 시작 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리덩후이는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으며 이 사건 50주년이 되는 1997년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2.28 기념관이 건립 되었다. 


현재의 시점에서의 2.28사건

이 사건은 대만의 국부라고 불리는 장제스가 연루되어 있기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학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연구까지 보고 되었다. 이에 대만의 진보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당을 폐지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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